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이유

by 뫼비우스토리 2023. 3. 20.
반응형

히틀러
히틀러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

1939년에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die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유대 인의 물리적 절멸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주장한 바 있는 독일인의 생존권(Lebensraum)을 동방 지역에 만들기 위해서는 레닌그라드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유대계 독일인을 이주시키고, 이에 맞추어 현지인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부 지역 이민족 처리에 관한 몇 가지 구상〉이라는 비밀보고서에서 유대인들을 물리적으로 절멸, 즉 살육하는 것은 '볼셰비키적 방법'이라 비난하고 '비독일적'일 뿐이며 불가능하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는 독일인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방 지역의 인구 이동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거주 비율이 높은 동방 지역이기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나치는 '마다가스카르 계획(Madagaskar Plan)'을 구상하여 유대인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에 집단으로 강제 이송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이 프랑스에 승리한 뒤, 곧 영국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낙관하는 가운데 프랑스로부터 빼앗게 될 마다가스카르에 대규모의 게토, 즉 유대인 집단 거주 구역을 만드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영국 본토 계획이 좌절되자 120척이나 되는 선박을 동원하여 매년 100만 명씩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강제 이송하려던 나치의 야심 찬 계획은 곧바로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이 전개되자 동유럽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어떻게 처리하고 독일인의 '생존권'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난 문제로 대두했습니다.

 

그리하여 '최종적 해결'이란 문제는 강제이주에서 물리적 유대인 절멸 계획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방안에 따라 1941년 초여름부터 소련 지역을 중심으로 살인 특무부대(Einsatzgruppen)라고 칭하는 친위대 산하 학살을 전담하는 부대가 투입되었고, 1942년부터는 폴란드 지역에서 여러 곳의 학살을 전문으로 하는 강제수용소가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경위로 볼 때 유대인 절멸 계획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상황의 추이에 의해 전개 발전했다는 주장이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뉘른베르크법'에 통해 유대인이 되는 판단 기준은 제시되었으나, 유대인 절멸 계획을 시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 '반제 호수' 가에서 친위대 산하의 제국 보안국 국장 하이드리히가 주재하는 '반제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회의록의 책임을 진 아이히만과 13명의 차관급 인사들이 참석하여, 절멸 대상 유대인에 관한 확인을 주로 토의했습니다.

 

회의록에 따르면 절멸 대상 유대인을 모두 1,100만으로 잡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누락된 유대인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이드리히는 강제 이송 대상자를 '이 잡듯이' 색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사람을 죽이는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유대인 캠프의 소장 헤스가 그 방법들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총살은 너무 느렸고 사격병들은 귀찮다고 했습니다. 일산화탄소 역시 비능률적이라 판명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헤스는 500명의 소련 전쟁포로를 실험용 모르모트로 취급하여 취클론-B로 대량살상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이 약재는 I. G. 파르벤의 자회사로 페스트 구제를 위한 제약회사인 데게슈에 의해 제조된 것입니다. 헤스는 이 취클론-B의 성능에 만족했습니다.

 

그의 친위 조직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인디게이터'를 제거한 취클론-B를 대량 주문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이 약재의 사용처를 짐작했으나 데게슈의 유일한 문제 제기는 '인디게이터'를 넣지 않으면 특허권을 침해당할 우려가 있다는 정도였습니다.

 

 

 

전멸 캠프에 의한 최초의 가스 대량학살은 1942년 3월 벨제크 수용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포로수용소는 하루에 1만 5,000명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습니다.

 

이 방법을 헤스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인간 말살을 위한 가장 위대한 시설이다."라고 자찬했습니다.

 

1941년 12월까지 히틀러는 약 870만 명의 유대인을 그의 통치하에 두고 있었는데 종전까지 그들 중 적어도 58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200만 명이 살해된 아우슈비츠에서는 그 과정이 거대한 공장에서 작업하듯이 시행되었습니다.

 

유대인 희생자를 실은 열차가 도착하면, 건강한 사람들은 노역소로 보내졌고, 약하고 연약해 보이는 여인과 아이, 노인 등은 곧장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가스실로 가는 유대인 행렬을 환송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대인 음악가로 구성된 악단이 클래식 곡을 연주했습니다.

 

희생자들은 욕탕이라 지칭된 가스실로 직행했습니다. 목욕하기 전에 모든 유대인은 소유물을 남기고 옷을 벗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시체로부터 나온 빈약한 소유물들, 즉 산더미처럼 쌓인 가방과 남자 양복과 내의, 여자옷, 아동복 등이 '공식적으로 수거'되어 독일 본국으로 보내어졌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금속기둥의 구멍으로부터 가스가 나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에는 인디케이터가 제거된 가스를 그들도 몸으로 느끼고 그 험악한 기둥에서 떨어져 작은 창문이 달린 철문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꿈쩍도 않는 철문을 주먹으로 치면서 몸부림치게 됩니다. 철문 앞에서 서로 할퀴고 치고받으면서 결국은 끈적끈적한 피를 토하면서 피라미드처럼 시체로 쌓이게 됩니다.

 

25분 후에는 전기 펌프식 배출기가 가스를 빼내면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유대인 모범수들이 들어갑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와 오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서로 엉겨 붙은 시체들을 올가미와 갈고리로 떼어내고, 나치가 전략물자로 간주하고 있는 금이빨과 머리털을 자르는 소름 끼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후 그 시체들은 들것이나 인력거에 실려 용광로로 옮겨져 태워진 후 분쇄기로 들어가 곱게 갈려진 재가 되어 화물트럭으로 솔라강 하류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종종 값비싼 가스를 적은 양만 사용했는데, 가끔은 건강한 희생자가 인사불성인 상태로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대에는 직접적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독일 산업계도 가담했습니다. 친위대는 유대인 노동력을 이들 기업에 제공함으로써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크루프, I. G. 파르벤, 지멘스, 라인메탈, 메서슈미트, 하인켈 등 대기업들도 포로수용소의 노동력을 이용한 대가로 두둑한 현금을 친위대에 주었습니다.

 

히믈러는 절충안으로 독일 기업을 죽음의 수용소로 옮겼습니다. 친위대와 I. G. 파르벤은 아우슈비츠 구내에 인조 고무공장과 염료 센터를 건설하여 긴급한 전략 군수산업을 가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은 자유로움을 제공한다!"라는 구호를 수용소 문에 크게 내걸고 유대인의 노예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착취했습니다. I. G. 파르벤은 유대인의 노예 노동력을 최대한 소모하고자 했습니다.

 

유대인의 힘을 최대한 추출하여 노동력으로 쓰고, 이용할 힘이 고갈하면 가스실과 용광로에 처리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악한 경영에도 아우슈비츠는 완전한 실패작이었습니다. 염료나 합성고무의 생산성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이들 유대인 수용자들에게는 의학적인 생체실험도 시행되었습니다.

 

350명의 친위대 의사들은 수용소 포로를 대상으로 빙사온도(氷死溫度) 실험을 하여 수십 명을 죽였고, 세균 감염증에 유효한 합성 화합법을 실험하기 위해 가스 회저병에 감염시켰으며, X선을 조사하여 불임 조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발진티푸스 백신을 주사한다든가, 뼈 이식 수술을 시험해 본다든가, 바닷물을 마시게 하기도 했습니다. 히믈러는 괴팍한 취미를 만족하게 하려면 유대인 공산주의자의 해골을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나치의 절멸 계획은 그 거대한 규모에도 은밀히 진행되었습니다. 히틀러는 공개적인 연설이나 좌담에서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주책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에도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 절멸 계획에 관한 한 어떤 명령도 말로 전달했고 문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엄청난 증오심이 가득했으나 기이하게도 그 증오심은 언제나 추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절멸 계획이 독일 '문화'에 대한 최대의 봉사라고까지 간주했습니다.

 

 

 

만약, 그가 불행한 희생자들을 개인적으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보았더라면 가스실에서의 대량학살을 과연 용인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절멸 캠프를 방문한 일이 없었고, 아우슈비츠의 감독자였던 히믈러조차 그곳을 단지 두 번 방문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치는 절멸계획을 은밀한 은어로 표현했습니다. 살인은 친위대의 언어로 '특별조치', '재식민(再植民)', '일반적 수단', '사법부의 권한을 벗어난 주권자의 행동' 등으로 표현했고, 흔히 '동방 이송'이라 표현했습니다.

 

 

 

나치는 절멸 수용소를 극도로 비밀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 살인공장 주변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습니다.

 

밤새워 덜컹거리는 유대인 호송 열차를 보면서 인근에 살고 있던 일반 독일인들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저 저주받은 유대인들 ― 밤에조차 제대로 잠을 자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라고 차디찬 불평을 토로했을 뿐입니다.

 

 

 

유대인도 히틀러 초기에는 국외 탈출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환영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모든 유럽 정권들이 히틀러가 반유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문제를 건드려 악화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영국은 아랍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밸푸어선언에 의해 유대인에게 약속했던 이주(移住)의 문을 닫아버리려고 했습니다.

 

1939년 영국 정부의 백서에 따르면 앞으로 5년간 유대인의 이민을 7만 5,000명으로 제한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도 항상 말로만 유대인에게 동정을 보내었을 뿐 그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데 대해 어떤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국가였습니다. 단지 영국의 처칠만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유대인의 이주를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처칠도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든은 그의 비서가 말한 대로 아랍인들을 좋아했으며 유대인을 미워했습니다.

 

스탈린은 전쟁이 끝나면 제1차 세계대전 후처럼 독일 혁명을 통해 독일의 소비에트 정권이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공동성명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고 했습니다.

 

 

 

전후 유대인 절멸 캠프에 경악한 연합군, 특히 영국과 미국은 나치의 학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열정을 기울였으나 그것도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들어갔습니다.

 

나치 학살을 협조했던 독일의 기업가들은 전후 재판에서 관대한 처분을 받았습니다.

 

I. G. 파르벤의 인조고무공장 책임자였던 크라우흐는 단지 6년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어서 한 검찰관은 '좀도둑마저 기뻐할 만큼의 가벼운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새 연방정부의 전후 보상은 보잘것없었습니다. 생존한 50만 명의 수용자 중 1만 4,878명만이 몇 년간의 소송 끝에 겨우 1,250달러씩 보상을 받았을 뿐입니다.

 

크루프 회사는 미국 정부의 압력을 받고 나서야 총 238만 달러를 지급했습니다. 재벌 프리드리히 프리크는 버티며 보상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972년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 10억 달러 이상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반응형

댓글